들어가며: 소리만 있고 글이 없다면 일어나는 일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핵심 작업은 무엇일까요? 바로 '표기법의 표준화'입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음성을 일관된 기호, 즉 문자(글자)로 정확히 적어둘 수 있어야 비로소 책으로 만들고, 학교에서 교육하며, 후대에 기록으로 물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주 방언을 글로 적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표준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음운인 '아래아(ㆍ)' 발음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어미 변화나 어휘 구조가 육지어와 크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처음 제주어 문헌이나 시집, 소설을 읽었을 때 저자마다 제주어를 적는 방식이 제각각이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책에서는 표준어 자모음으로 대충 비슷하게 적고, 어떤 책에서는 알 수 없는 특수문자를 혼용하기도 했죠.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고 제주 방언을 하나의 정교한 언어 체계로 바로 세운 것이 바로 '제주어 표기법'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학자들과 국어학계가 제주 방언을 기록하기 위해 불태웠던 노력과 표기법의 핵심 규칙을 알아보겠습니다.
1. 제주어 표기법 제정 이전의 혼란과 갈등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제주 방언을 표기하는 통일된 기준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주어를 연구하는 학자나 지역 문인,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표준어식 맞춤법 맞추기: 제주 방언의 소리를 무시하고 무조건 현행 한글 맞춤법 표준어에 맞춰 적다 보니, 실제 발음과 완전히 딴판이 되는 문제
소리 나는 대로 적기(음성 표기): 발음 그대로 적다 보니 단어의 본래 뜻(어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사람마다 스펠링이 달라져 독해 불가능
방언 조사자마다 다른 기호 사용: 제주어의 '아래아(ㆍ)'나 특수 음운을 표기할 때 연구자마다 각자 다른 기호를 써서 데이터의 통합이 불가능했던 문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주어 뉴스를 방송하거나, 교과서를 만들거나, 사전(Dictioanry)을 편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2. 2014년 '제주어 표기법'의 탄생과 3대 기본 원칙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와 국어학자, 언어학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오랜 학술 토론과 검증 끝에 2014년 공식적으로 '제주어 표기법'이 제정 및 고시되었습니다.
제주어 표기법은 한글 맞춤법의 기본 골격을 존중하면서도, 제주어의 독자성을 100% 반영할 수 있도록 다음 3가지 핵심 원칙을 세웠습니다.
① '아래아(ㆍ)'의 공식 모음 채택
가장 큰 변화는 단연 '아래아(ㆍ)'를 공식 표기 모음으로 되살린 점입니다. 현대 한글 맞춤법에서는 사라진 글자이지만, 제주어 표기법에서는 아래아를 11번째 단모음으로 당당히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ᄀᆞᄋᆞᆯ(가을)', 'ᄆᆞᆯ(말)'처럼 제주어의 실제 음가를 정확하게 문자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②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형태를 밝혀 적는다
제주어 표기법 역시 한글 맞춤법 제1항과 동일한 철학을 따릅니다. 무작정 소리 나는 대로만 적으면 단어의 뜻을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체본(명사)과 조사, 용언(동사/형용사)의 어간과 어미를 구분하여 형태를 밝혀 적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③ 제주어 특유의 어미와 조사 표기 규정
표준어에는 없는 제주어 전용 의문형 어미('-가', '-고', '-꽈', '-오')와 존칭 접미사('-예') 등의 표기 기준을 정립했습니다. 이를 통해 "어디 가우꽈?"나 "혼저옵서예" 같은 문장을 전국 어디서나 통일된 스펠링으로 적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표기법 제정이 가져온 삶과 문화의 변화
제주어 표기법이 체계화되면서 제주 지역사회에는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제주어대사전》의 편찬: 표기 기준이 세워짐에 따라 잊혀가던 수십만 개의 제주어 어휘를 체계적인 사전으로 집대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어 문학 및 콘텐츠의 활성화: 제주어로 쓰인 시, 소설, 연극 대본, 가요 등이 표준화된 표기로 출판되면서 독자들과의 소통 문턱이 낮아졌습니다.
공공 표지판 및 학교 교육: 제주 관내 도로 표지판이나 안내문, 초등학교 제주어 교재에 표준화된 제주어가 적용되어 시민들이 일상에서 올바른 제주어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기록을 넘어 실천으로: 표기법의 남은 과제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주어를 적는 완벽한 '틀'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있습니다. 바로 디지털 환경에서의 표기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키보드(한글 자판)에서는 '아래아(ㆍ)'를 입력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불편합니다. 특수문자를 찾거나 별도의 자판 프로그램 설치가 필요하다 보니, 젊은 세대가 SNS나 블로그에서 표준 제주어 표기법을 사용하기엔 진입장벽이 높은 편입니다.
글자는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쓰이기 쉬워야'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디지털 자판 체계의 개선과 더불어, 우리가 이 아름다운 표기법을 적극적으로 익히고 사용하는 실천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핵심 요약
표기법 제정의 필요성: 통일된 표기 기준이 없어 발생하던 어원 왜곡, 연구자 간의 혼란, 교육 교재 제작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014년 '제주어 표기법'이 공식 고시되었습니다.
아래아(ㆍ)의 공식화: 현대 한글 맞춤법에서 소멸한 '아래아'를 공식 모음으로 인정하여 제주어의 정확한 발음과 어원을 문자로 완벽히 보존했습니다.
기록과 교육의 기틀: 표기법 정립을 통해 사전 편찬, 제주어 문학 창작, 학교 현장의 보존 교육이 체계화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 다음 편 예고
다음 11편에서는 제주어 표기법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는 제주 민요와 구비 신화 속 제주 방언의 미학과 문화적 가치를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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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로 '아래아(ㆍ)'나 방언을 입력해 보려고 할 때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언어 보존을 위한 디지털 환경 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댓글로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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